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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하는 ���, 변화하는 존재들 : 노을공원과 노을공원시민모임에서 나타난 다종적 조우의 가능성

노을공원과 노을공원시민모임

서울시 마포구 성산동과 상암동 일대에 위치한 난지도는 1978년부터 1993년까지 총 15년간 서울 전역과 수도권 대부분의 쓰레기를 처리하는 매립지로 사용되었다. 급격한 산업화 및 도시화와 함께 급증한 쓰레기 모두를 한 곳으로 집중시키는 바람에, 더 이상 매립이 불가능해질 즈음이 되자 한강 수면보다 7m가량 낮은 평지였던 난지도에는 해발 98m의 거대한 쓰레기산 두 개가 만들어졌다. 15년 간 묻힌 쓰레기의 양은 8.5톤 트럭 1,300만 대 분량인 9,197만 2천 톤에 달했다. 유례없는 높이의 쓰레기산을 생태공원으로 만들겠다는 결정은, 2002년 한일월드컵을 위한 월드컵경기장 부지가 난지도 인근으로 지정되면서 이뤄졌다. 그렇게 월드컵 직전인 2002년 5월, 하늘공원, 노을공원, 난지천공원, 난지한강공원, 평화의공원 총 5개 공원으로 구성된 월드컵공원이 개장한다. 이 중 두 개의 쓰레기산을 덮고 만들어진 곳이 바로 노을공원과 하늘공원이다.

난지도는 인간 활동에 의해 생태계가 번성하기 어려운 쓰레기 매립지로 사용되다가 이제는 다양한 생명이 거주하는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을 띠게 되었다. 따라서 난지도는 인간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은 순수한 ‘자연’의 공간으로도, 반대로 인간에 의해 형성된 ‘문화’가 만들어 낸 온전한 인간 거주지로서의 도시적 공간으로도 정의할 수 없는 복잡한 공간이다. 그렇다고 해서 실제 난지도가 재현되는 방식이 이러한 서구적 자연-문화 이분법을 깨뜨리는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가령, 서울시의 월드컵공원에 대한 설명은 “불모의 땅에서 다시 생명의 땅으로” ‘복원’된 난지도의 서사를 강조하며, 인간 활동이 일으킨 “환경파괴를 묵인한 고도성장에 대한 뼈아픈 반성”과 함께 인간에 의해 다시 ‘되살아나고’ 있는 생태계의 모습을 보여준다(월드컵공원 공식 홈페이지 참조). 이는 ‘자연’을 ‘문화’의 일방적인 개입에 의해 파괴될 수도, 복원될 수도 있는 수동적인 존재로 여기는 이분법적 구도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제기 및 연구목적

본 연구는 난지도를 설명하는 기존 담론의 바탕에 깔린 서구적 자연-문화 이분법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기반으로, 월드컵공원의 5개 공원 중 하나인 노을공원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인간 및 비인간 존재들의 상호작용과 그로 인해 나타나는 역동적 생태계에 주목한다. 따라서 노을공원시민모임의 활동을 ‘자연’으로 표상되는 숲에 대한 인간의 일방향적 통제가 아니라, 숲에 연루된 다양한 존재들이 행하는 상호작용의 일부로 해석하려고 한다. 비인간 행위자에 대한 관심이 증대하고 있는 근래의 인류학적 흐름 속에서, 본고는 노을공원에 연루된 다양한 인간 및 비인간 행위자들을 함께 연구참여자에 포함시키는 ‘다종민족지(multispecies ethnography)’를 표방한다. 즉, 비인간 존재들을 인간 활동의 일방적인 대상이나 자원, 또는 인간 문화 속에서 표상적/상징적 의미를 부여받은 기호로서만 다루지 않고, 오히려 인간과 연결되며 적극적으로 사회를 구성하고 변형시키는 존재로 파악하려는 것이다. 이는 앞서 언급했던 자연-문화의 이분법을 넘어선 관점 속에서만 가능한 시도이다. 해러웨이는 ‘자연문화(natureculture)’(해러웨이 2019)라는 개념을 통해 자연과 문화가 서로 분리될 수 없으며, 모든 존재는 자연문화라는 하나의 연속체 속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주장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노을공원이라는 자연문화 속에서는 인간과 비인간이 서로 어떻게 얽힌 채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특히, 노을공원은 이러한 자연과 문화의 얽힘이 다른 곳보다 명료하게 드러나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더욱 흥미롭다. 쓰레기산이었던 과거가 현재까지도 노을공원의 물질성에 영향을 끼치고 있기 때문이다. 시민모임의 활동가들과 봉사자들은 활동 과정에서 수시로 노을공원 아래에 매립되어 있던 쓰레기를 발견하며,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공원의 특성으로 인해 자꾸만 활동 방식을 제한당한다. 연구는 이러한 경험을 통해 자연과 문화에 관한 시민모임의 인식이 전환되고 있음을 주장할 것이다. 이러한 인식의 변화는 윤리의 변화를 요청한다. 세계가 다르게 인식된다면, 기존의 세계를 위한 윤리는 그 효력을 잃기 때문이다. 다종 간의 조우에 관한 인식적/윤리적 태도에 관해 활발히 논의되고 있는 ‘응답’(해러웨이 2019) 개념을 통해, 본 연구는 서로 다른 종들이 불규칙하게 조우하는 노을공원의 숲이라는 한정된 공간 속에서 어떠한 윤리가 탄생하고 변화해 가는지 탐구한다. 이때의 윤리란 단지 인간이 단독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종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새롭게 생성되는 관계적 개념이며, 종은 단지 생명체들을 나누는 범주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다른 종과 연결되며 그 접촉을 통해 행위자성을 부여받는 모든 존재들을 지칭한다.

나아가, 본 연구는 이렇게 만들어지는 ‘응답’의 윤리와 그 실천이 숲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있는지 질문한다. 다종적으로 얽힌 노을공원의 특수한 복잡성으로 인해,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숲의 변화, 또는 천이 과정은 기존의 생태학적 지식이 묘사하던 ‘자연스러운’ 숲의 천이와는 다른 양상을 띠는 ‘재야생화’(최명애 2021)의 과정으로 판단된다. 자연이 아닌 자연문화로서 숲을 바라보며, 연구는 노을공원에서 인간 행위자가 숲에 끼치는 영향을 일방향적인 ‘개입’ 대신 어떠한 의미로서 해석할 수 있을지 질문하며, 그로 인한 변화는 어떤 모습인지 알아볼 것이다.

요약하자면, 본 연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한다.

첫째, 노을공원시민모임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으며, 이들은 어떤 동기와 목적으로 활동에 참여하는가? 시민모임의 활동가와 봉사자들은 활동을 통해 어떻게 변화하는가?

둘째, 노을공원의 물질성은 어떠한 역사 속에서 형성되었고, 이는 현재의 노을공원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가? 시민모임은 이러한 물질성 앞에서 노을공원이라는 세계에 대한 인식과 태도를 어떻게 변화시키는가?

셋째, 다종적 접촉이 빈번하게 벌어지는 노을공원이라는 공간 속에서 형성되는 윤리는 어떠한가? 그것은 어떠한 관계와 실천 속에서 만들어지고, 또 만들어 내는가?

넷째, 순수한 ‘자연’이 아닌 자연문화로서 숲을 인식할 때, 인간 행위자들이 숲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어디인가? 이들의 활동은 숲의 다양한 종들과 연결되며 어떠한 변화를 이끌어내는가?

연구방법

본 연구는 인터뷰와 참여관찰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3월부터 3개월간 총 7번의 현장연구 기회가 있었으며, 주 연구 필드인 노을공원에서는 무리개미 나무심기, 개별개미 나무심기, 기업단체행사 인솔, 뒷정리 등의 활동에 참여했고, 노을공원시민모임(이하 시민모임)의 행정적 업무가 진행되는 합정동 사무실을 방문해 독서모임과 시민모임 운영위원회의에 참여할 수 있었다. 다양한 행위자들의 상호작용과 그에 따른 변화 과정을 탐색하며 비인간 존재와 인간 행위자의 관계 맺음을 추적해 나가는 주제의 특성상 참여관찰은 필수적으로 수반되어야 했으며, 연구자들이 현장에 직접 연루되는 감각을 체험할 수 있었다. 연구자들 개개인이 참여관찰을 진행하고 그날의 경험과 기억을 필드일지로 기록하여 공유하였고, 빠른 시일 내에 회의를 잡아 연구의 방향성을 피드백했다.

시민모임의 활동 장소는 노을공원 및 하늘공원 사면 전체, 노을공원 상부 공원 부지에 시민모임을 위해 배정된 나무자람터, 노을공원 주차장에 위치한 현장사무실, 사무 업무와 각종 회의가 진행되는 합정동 사무실 등이 있다. 이 중 합정동 사무실을 제외한 세 장소는 모두 공원 내부에 위치한 곳으로, 활동에 참여한다면 항상 이 세 곳을 거치게 된다. 초기의 현장연구에서는 시민모임의 봉사활동에 집중하며 현장에 적응하는 시간을 가졌다. 몇 번의 현장연구를 경험한 후에는 참여관찰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봉사자들을 심층인터뷰를 위한 연구참여자로 섭외할 수 있었다. 그러나 본 연구자들이 참여한 무리개미 행사의 특성상 이들 중 대부분은 단기 봉사자였기 때문에 보다 다양한 표본집단을 설정하기 위하여 장기 봉사자들을 모집했다. 연구자 중 한 명이 이미 노을공원에서 봉사한 경험이 있어 연구자의 지인들을 연구참여자로 섭외할 수 있었다.

노을공원시민모임의 주요 현장 활동구역인 '나무자람터' 매핑

이외에 실질적으로 활동의 방향을 정하고 시민모임을 운영하는 활동가들을 주요 연구참여자로 설정했다. 심층인터뷰에 많은 시간을 투자했으나, 활동가의 업무시간을 이용하여 인터뷰가 진행되었기 때문에 업무 중인 활동가를 따라다니며 즉흥적으로 문답하였다. 본 연구자들이 연구를 진행한 3월에서 6월은 겨울이 끝나고 나무를 심는 시기였고, 활동가들이 굉장히 바빴기 때문에 활동가와 인터뷰를 진행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따라서 본 연구자들은 활동가의 조언에 따라 시민모임 공식 다음카페를 통해서 많은 정보를 얻었다. 공식 카페는 시민모임의 초창기부터 축적된 방대한 양의 자료가 기록되어 있었기에 연구에 전반적인 도움을 주었다. 특히 자연의 변화가 3개월 만에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에 연구자들이 직접 숲의 변화를 볼 기회가 부족하다는 한계가 있었는데 이 또한 카페의 기록을 통해 보충할 수 있었다. 한편, 『평화의 산책』(김성란 2018)은 시민모임의 봉사자였던 작가 김성란이 수많은 자원봉사자와 함께 숲을 만들어 온 경험을 풀어쓴 책이다. 시민모임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을 습득하는 데 도움을 주었으며 시민모임이 어떠한 가치들을 공유하고 있는지 파악할 수 있었다. 그 밖에도 총 16명의 활동가와 봉사자를 대상으로 심층인터뷰를 진행했고, 모든 인터뷰는 사전에 인터뷰 주제, 활용 방향 등을 고지하였으며 정보제공 및 활용 동의서를 통해 정보의 수집과 공개, 이용 가능한 정보 등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하였다.

I. ‘쓰레기산’ 노을공원: 분리할 수 없는 자연문화

1. 출입금지구역

시민모임이 주로 활동하는 공원 사면은 일반 시민들이 드나들 수 없는 출입금지구역이다. 앞서 지형도에서 확인할 수 있었듯, 인위적으로 형태가 결정된 노을공원은 평지인 상부와 이를 둘러싸는 사면이 명확히 구분되어 있다. 그중 실제 공원 부지는 상부로 한정되어 있으며, 사면은 상부에 올라가기 위한 길이나 ���이에 나 있는 일부 산책로, 관리용 차도를 제외하면 울타리나 철문으로 가로막혀 있다. 시민모임은 사업소의 협조를 받아 사면에 자유롭게 드나들며 활동을 진행하지만, 평범한 공원 방문객들은 그럴 수 없다. 사면이 출입금지구역이 된 이유는 자연 보호나 생물다양성을 위한 것만은 아니다. 사면의 흙은 이미 많이 쓸려나가 아래에 있던 쓰레기가 드러나 있다. 그중에는 철골, 콘크리트 조각 등의 건축폐기물이 많은데, 땅 위로 뾰족하게 솟아 있는 건축폐기물은 그곳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안전을 위협한다. 또한 쓰레기가 숲에 보이는 풍경은 그 자체로 더럽고 불쾌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상부와 사면이 명확히 구분되어 있기 때문에, 사면에 들어서는 일은 한순간에 벌어진다. 대개의 경우, 봉사자들과 활동가들은 나무자람터에서 출발해 공원 상부 가장자리 길을 따라가다 울타리를 넘어 사면에 들어선다. 봉사를 처음 온 사람들은 여기서 종종 주저하거나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나무 심기 봉사를 하러 와서 울타리를 넘어 위험한 경사를 내려갈 거라는 생각은 잘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에게 울타리를 넘는 일은 개방되지 않은 공간에 들어간다는 두근거림이나 예상치 못한 경험으로 인한 즐거움을 유발하기도 했다. 첫 봉사자들은 잘 관리되어 깔끔한 공원 상부를 떠나, 어색한 동작과 함께 통과를 온몸으로 감각하며 출입금지구역인 사면에 들어선다.

울타리와 철문 너머의 공간은 상부에 비해 상대적으로 ‘야생’의 이미지가 강한 숲이다. 울타리를 넘는다면, 급경사를 내려가야 한다. 몇 달 전까지는 밧줄을 붙잡고 내려갔지만, 코로나로 인한 거리두기가 해제되고 새로 오는 봉사자들의 수가 늘어나며 안전을 위해 점차 사면에 마대 자루를 이용한 계단을 만들고 있었다. 자루 안에는 흙과 도토리 씨앗, 그리고 풀씨가 들어있다. 시간이 지나면 이 자루에서 싹이 날 것이라고 활동가들은 기대하고 있었다. 그때가 되면 더 이상 이 계단-씨드뱅크가 향하는 구역에는 집단으로 나무를 심으러 갈 필요가 없어질 것이다. 노을공원의 사면은 넓고, 활동이 주로 진행되는 장소는 시간이 지나며 계속 달라진다. 지금 자루는 인간을 위한 계단이지만, 미래에는 나무가 될 수 있다. 그것은 자루에 담긴 씨앗이 인간의 발걸음을 견뎌낼지에 달렸다. 시민모임은 자루의 다중적 의미를 인지한 채 계단-씨드뱅크를 만들었고, 거기에 참여한 봉사자들은 자신이 만든 계단-씨드뱅크가 다른 봉사자들의 안전한 활동을 돕고 있다는 사실에 뿌듯해하며 나무로서의 미래를 기대하고 있었다.

밧줄조차 없던 시민모임 결성 초기, 밧줄을 타고 사면을 넘나들던 몇 달 전까지, 그리고 계단-씨드뱅크가 설치된 현재, 이 모든 기간 동안 사면은 계속해서 출입금지구역이었다. 만약 사면이 출입금지구역이 아니고 정부가 직접 안전을 관리했다면, 울타리 넘기도 밧줄도 계단-씨드뱅크도 존재할 수 없었��� 것이다. 의도치 않게도, 사업소가 사면에 시민 출입을 제한하는 바람에, 사면은 시민모임이 자유롭게 드나들고 인간과 자연의 공존을 모색하며 자신들의 생각을 이리저리 실험하고 물질들을 계속해서 새롭게 의미화하는 장이 될 수 있었다. ‘자연’과 ‘인간’의 인위적 거리두기가 역설적으로 시민모임에게는 사면을 ‘자연문화’의 공간으로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초기봉사자의 울타리 넘기 통과의례는 겉보기에는 잘 관리된 인간의 공간에서 ‘야생’의 공간으로 진입하는 과정처럼 보인다. 그러나 숲을 점차 자주 찾아오며, 봉사자들은 울타리 너머의 공간이 단순히 봉사활동을 통해 되살려 줘야만 하는 수동적인 대상도, 인간이 배제된 순수한 자연도 아님을 깨닫는다. 울타리 너머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는 그런 단순한 이데올로기를 뛰어넘는다.

2. 쓰레기

쓰레기는 노을공원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 평범한 공원 방문객들은 쓰레기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시민모임에서 활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쓰레기는 매우 일상적인 사물이다. 시민모임의 봉사활동은 사면의 흙을 파야 하는 경우가 많다. 나무를 심을 때도, 동물물그릇을 설치할 때도, 씨드뱅크를 만들 때도 언제나 땅에 구덩이를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땅을 파면, 어김없이 쓰레기가 나온다. 이렇게 발견되는 쓰레기는 크게 건축폐기물과 생활쓰레기로 나눌 수 있다. 건축폐기물은 안전을 위협할 뿐 아니라 땅속에 커다랗게 자리 잡아서 삽질을 방해한다. 나무를 심으려면 충분한 깊이로 땅을 파야 하는데, 중간에 딱딱한 콘크리트를 만나면 파둔 땅을 포기하고 다른 곳으로 장소를 옮겨야 한다. 소용없는 땅을 빨리 포기하는 게 더 많은 나무를 잘 심기 위한 방법이다. 물론 건축폐기물로부터 완전히 동떨어진 구덩이를 파기는 어렵다. 활동가들은 쓰레기가 있어도 나무는 자라니 대충 심을 수 있으면 심으라고 조언한다. 물론 아래에 있는 쓰레기가 너무 크다면 금세 죽어버릴 수도 있지만, 그걸 너무 걱정하다가는 나무를 심을 수가 없다. 결국, 쓰레기와의 거리를 어떻게든 조절해서 쓰레기와 가장 적절한 타협점을 찾는 것이 나무 심기의 핵심이다.

노을공원에서 나무를 심는 일은 이렇듯 쓰레기의 행위자성에 영향을 받으며 점차 쓰레기와의 협상 능력을 향상시켜가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능력은 활동 경험에 따라 천차만별이라, 처음 온 단체봉사자는 한두 그루를 심지만 장기봉사자는 두세 시간에 걸쳐 열댓 그루를 심고, 활동가는 하루 종일 일하며 100그루까지도 심을 수 있다. 초기 봉사자들은 구덩이를 파다 쓰레기를 발견하면 당황하고, 어딘가로 치워야 한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품는다. 하지만 이 쓰레기는 치울 수가 없다. 치워서 이곳으로 도착한 쓰레기들이기 때문이다. 봉사자들은 수많은 쓰레기들을 마주하면 이내 이것들을 치울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며, 결국 쓰레기를 그냥 둔 채로 나무를 심는다. 썩지 않는 현대 사회의 쓰레기는 처음 모습을 그대로 유지한 채 흙 속에서 남아있다. 쓰레기와 흙은 같은 공간에 있으나 결코 전적으로 뒤섞이지 않으며, 그 이질성을 품은 채로 불편한 공존을 이어나간다.

(왼쪽) 연구자들이 땅을 파며 발굴한 쓰레기들: 왼쪽부터 사탕봉지, 호스, 고무신.

“여기서는 활동가들이 말씀하시는 것도 그렇고 쓰레기를 버릴 공간이 마땅치 않다는 걸 알고 있거든요 제가. 근데 자취 생활을 하면서는 너무 쉽게 쓰레기를 처리해버릴 수가 있잖아요. 내가 그냥 눈에 보이는 게 싫으면 봉투에 담아서 그냥 앞에 갖다 버리면 끝이니까. 거기서 이제 쓰레기에 대한 생각이 멈추는데 노을공원에서는 멈출 수가 없어요. 내가 이걸 계속 들고 가야 되는 거, 그다음에 내가 지금 나무를 심는 것도 쓰레기로 묻혀 있는 공간, 그 땅 위에 나무를 심는 거니까. 그것에 대한 생각이 단절될 수가 없는데 그 공간에서 벗어나는 순간 바로 쓰레기를 내다 버릴 수 있는 존재가 돼버리는 거죠.” – 봉사자 G

장기봉사자이자 시민모임 인턴이기도 한 봉사자 G는, 자취방에서는 “눈��� 보이는 게 싫으면 (…) 갖다 버리면 끝”나는 쓰레기가 노을공원에서는 자꾸 존재감을 드러낸다며 말을 이었다. G의 표현처럼, 노을공원에서는 쓰레기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가 없”다. 앞서 언급한 봉사자 F는 노을공원에서 쓰레기를 봐도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돼서 이제는 쓰레기를 봐도 아무 감정이 들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동시에 “숲이 잘 자랄 수 있을까” 걱정하기도 했다. 쓰레기는 이렇듯 봉사자들 사이에서도 그 자체로 더러운 것이라기보단 숲과 환경을 파괴할 수 있기에 부정적인 것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노을공원 바깥으로까지 이러한 인식이 얼마나 확장되는지는 봉사자들마다 다 달랐다. 그러나 많은 봉사자들이 일상 속에서도 쓰레기의 존재를 이전보다 더 자주 생각하고 있었고, 쓰레기를 줄이기 위해 저마다의 실천을 이어가고 있었다.

숨겨야 하는 것에서 생산하지 말아야 하는 것으로. 이 미묘한 의미 변화는 실제 행동에서 커다란 차이로 나타나며, 궁극적으로 물질 그 자체로서의 쓰레기를 감소시키는 결과로 이어진다. 동시에, 이미 생산된 쓰레기는 새로운 의미를 획득한다. 쓰레기가 매립지로 간다는 것은 역할의 완전한 종결, 인간 사회에서의 최종적 격리, 자원 순환의 마지막 단계인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의미의 개방과 함께 쓰레기들은 다시 사물이 된다.

가령, 시민모임은 땅 위로 솟아올라 안전을 위협하던 철골을 꺼내 왼쪽 사진과 같이 작은 언덕에 놓인 벤치 위를 감싸는 장식물로 만들었다. 덩굴식물이 한때의 쓰레기를 타고 올라가고, 사람들은 그 아래에 앉아 사진을 찍는다. 이 모습이 드러내는 것은 단지 ‘인간에 의해 쓰레기가 새로 태어났다’ 정도의 이야기가 아니다. 덩굴식물과 벤치, 그 위에 앉은 사람과 주위를 둘러싼 각종 식물들, 이들이 서 있는 작은 언덕과 그 위로 올라가는 나무 계단 등, 이 모두가 철골과 특정한 방식으로 함께하고 있기에 철골의 물질성은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발휘될 수 있었다. 여기서, 저마다의 존재들은 관계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살아간다. 이분법적 범주가 무용해진 이 생동하는 그물망에서 인간은 모든 것을 통제하는 존재도, 대자연 앞에서 그저 미약한 존재도 아니다. 다른 모든 존재들과 마찬가지로 연결 속에서 자신의 행위자성을 발휘하는, 숲을 위한 하나의 공동 참여자이다. 이 작은 포토존의 이미지가 그들에게 들려주고 있는 이야기는 그런 내용이었다.

II. 응답의 발현: 노을공원의 특수성을 맞이하여

1. 나무의 시간을 이해하기

"(저 묻고 싶은 게 있었는데, 그렇게 변화가 체감되시는 거잖아요. 그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나요? 자연 회복이 점점 더 잘 되고 있는지 궁금해서.) 그.. 속도라는 개념은 이제 이게 사람의 시간이 있고 식물의 시간이 있어요. 이제 그걸 이제 제가 항상 주변에서 여쭤보는 사람들이 물어보면 대답하기가 그런 부분에서 좀 애매해요. 이거 어떻게.. 많아요? 많이 늘어나는 건가? 근데 또 식물의 시간은 다르거든요. 아까 나무 수명도 이야기했지만, 어떤 나무 몇백 년 살잖아요. 우리나라 5대 거목이라고 몇백 년 자라고.. 은행나무 팽나무 그다음에 왕버들 회화나무 그다음에 느티나무 이게 이제 5대 거목이라고 그러나 우리나라 5대 거목. 얘네들은 뭐 100, 천년을 살잖아요. 얘네들이 시간하고 우리 시간하고 다른 거죠. 그 부분에서는 조금 나중에 제가 어떤 관점으로 저한테 그걸.. 제가 파악을 하고 답변을 드릴게요." - 활동가 N

인터뷰를 몇 차례 거치며 모든 질문에 막힘없이 대답했던 활동가 N의 모습과 비교했을 때 머뭇거리며 대답을 유보한다는 점에선 상당히 의외인 반응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은, 의외인 것은 하나도 없었다. 연구자들이 식물이라는 다른 종과의 관계성에 대해 질문할 때 그는 언제는 원론적인 이야기를 역질문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었다. 아무리 노련한 활동가의 입장이더라도 인간의 입장에서 자연 회복의 판단 수준을 가늠하는 건 말이 안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노을공원시민모임의 다른 활동가들 역시 그와 비슷한 관점을 취한다는 사실은 다종적 조우의 공명을 보여���었다.

인간의 시간을 기준으로 구성해 왔던 지구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건 과연 인간일까? 오히려 바로 그러한 이유로 인간의 생존 가능성이 소멸하여 가는 걸지도 모른다. 서울시라는 인구집단의 폐기물을 난지도에 쌓아 올리자. 이제는 너무 많이 쌓였으니 비닐과 흙으로 덮어버리자. 그 위에 나무를 심을 때, 평지 같은 상부에는 우리의 놀거리를 만들어 두자. 그런 우리를 방해하지 않을 동떨어진 숲에선, 씨앗이 발화되면 예쁘게 보이게 일렬로 심어두자. 이것이 노을공원의 역사였다면, 지금 또 다른 역사 구성에 동참하고 있는 노을공원시민모임 활동가들의 말들에서는 인간이 무엇을 판단하고 이끄는 주체가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존재성이 완전히 없어지는 것 역시 아니다. 노을공원의 사면을 구성하는 셀 수조차 없는 수많은 종들 간의 관계를 구성해 나아가는 작업을 연구자들은 응답의 과정이라 볼 것이다.

2. 먹는 행위

칭(Tsing 2015)이 설명하는 버섯은 그 자체로서의 진화적 특성뿐만 아니라, 서식지로서 손상된 산림, 국제 무역의 중간 거래 네트워크, 수입국의 문화적 가치, 경제적 거래와 교환 방식 등과 치밀하게 결합한다. 노을공원에서 자라는 버섯은 물론 그가 말하는 송이버섯은 아니긴 하다. 하지만 이곳에서의 버섯 역시 다양한 삶과 결합하여 다종 적 관계를 맺는 걸로 보인다. 활동가 N의 말에 의하면 공원의 쓰러진 나무들에서 표고버섯과 느타리버섯이 자란다. 특히 버섯은 온도, 습도, 진도 편차에 민감한데, 우리나라 기후상 3~4월에는 온도 및 진동 편차가 커서 인위적인 재배 시 세밀한 조정이 개입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한다(한국임업진흥원 2017). 하지만 노을공원 사면에서 자라는 버섯에 대해서 활동가들은 적절 비율의 톱밥 배지를 제공할 뿐이고, 그 밖의 모든 요인은 숲의 환경이 제공한다. 이렇게 재배된 버섯은 원목 배지보다 맛이 훨씬 낫다고 활동가는 말한다. 올봄에는 표고버섯을 채취했고, 가을엔 느타리를 많이 딸 예정이다. 봉사자들이 오면 느타리를 직접 채취해서 가져갈 수도 있다.

한편 2021년 산림청에서 탄소 흡수력이 떨어지는 30년 이상 된 ‘오래된’ 나무를 베어버리고 새로운 나무를 심겠다는 정책을 발표했었다는 사실을 장기봉사자 F의 인터뷰를 통해 알게 되었다. 봉사자는 이 소식을 처음 듣고는 탄소중립의 실천을 위한 측면에서 정책이 타당하다고 믿었지만, 활동가의 말을 듣고 생각이 달라졌다고 전했다. 활동가 N에 의하면 오래된 나무는 나무 자체로 숲의 다른 종들에게 양분과 자원을 줄 수 있고, 따라서 오래된 나무라 하여 베어버리는 것은 다른 ���식물이 노을공원에서 사라지는 결과를 초래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죽은 나무에서 자라는 버섯들만 보아도, 나무를 베고 다시 심는 과정은 단지 그 특정한 나무 몇 그루만 마치 퍼즐 조각을 교체하듯이 딱 떨어지는 과정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활동가들이 버섯을 조금씩만 채취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라고 추정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설명을 알고 있는 연구자들에게 활동가는 허리를 굽혀 표고버섯을 딴 후 흙만 쓱쓱 턴 후 먹어보라며 건넸다. 이런 표고버섯을 섭취했을 때의 감응은 시장에서 돈을 주고 손쉽게 구(매)한 버섯을 먹을 때와는 다른 것이 분명하다. 죽은 운명의 존재들에서 자라난 균이라는 물질을 섭취하는 과정은 영양분을 흡수하는 것 그 이상의 의미였다. 버섯과 죽은 나무, 그리고 수많은 미생물 간의 알 수 없는 동맹관계는 ‘탄소중립’이라는 인류의 ‘무고한 평화’를 가장하지 않은 채 눈앞의 세속적인 것에 집중하게끔 한다. 그 속에서 활동가라는 인간종은 죽은 나무의 유능함, 자라나는 버섯의 유능함, 그리고 섭취하는 인간의 유능함을 추구해 그들의 웰빙에 유효한 활동인 톱밥 배지라는 실천을 한다. 물론 그런 접근이 언제나 성공한다는 보장은 활동가들도 장담할 수 없으며, 죽은 나무에서 버섯이 자라나는 유효한 기간은 4~5년이라는 점 역시 그들은 익히 알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무구하지 않은 ‘함께 되기’에 참여하는 것이다. 살아가는 현재의 단면에서 서로 얽힘의 상태를 맞이할 때, 상대가 가진 고유의 탁월함을 최상으로 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3. 나무 심는 행위

몇 년 전까지도 활동가들은 단체 또는 개인 봉사자들이 나무를 심으러 올 때면 심게 될 묘목을 식재 현장에 미리 가져다 두었었다. 연구자들이 현장에 첫 방문 했을 때 요령이 없어 사면으로 내려가는 것조차 버거웠던 것처럼, 식재 현장으로 가는 길은 언제나처럼 가파르기 때문이다. 거기에 사람 키보다 훌쩍 큰 묘목을 직접 들고 내려가기란 편하지 않을뿐더러 위험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식이다 보니 봉사자들은 자신이 심을 나무를 식재 현장에 가서야 처음 보게 되었다는 사실은 활동가들에게 질문을 안겨주었다.

“만약 우리처럼 나무를 품에 안을 수 있다면 어떨까? 걸어가는 십여 분이라도 나무를 품에 안으면 정이 들지 않을까? 그러면 조금 더 나무의 생명이 느껴지지 않을까?”(김성란 2018: 116)

연구자들이 나무를 심으러 갔을 때 역시 집합 장소로부터 묘목을 직접 안고 사면으로 걸어갔었다. 대부분은 집합 장소에 도착하면 활동가분들이 묘목을 미리 포댓자루에 넣어두어 포대를 들춰 올리기만 하면 되었다. 그런데도 한 번은 사무소 옆에 일렬로 분재 되어있는 묘목을, 다른 한 번은 나무자람터에서 5~10그루가 한 묶음으로 얽혀 자라고 있는 묘목 여러 묶음을 직접 뽑아서 포댓자루에 손수 넣는 작업도 거친 적��� 있다. 묘목을 품에 안는 건 마치 갓난 배기 아기를 막 안으면 다칠 위험이 있는 것처럼 요령이 필요하단 걸 깨달았다. 나무의 뿌리를 포대 안에 넣었으니 튀어나온 가지 부분들이 위로 가게 한 채로 몸에 가까이 가져온다. 이때, 이동하는 동안 나무가 마르지 않도록 포대 안에 소량의 물을 넣기 때문에 포대를 몸에 완전히 밀착시켜버리면 흙탕물이 온몸에 흐르는 낭패를 볼지도 모른다. 연구자가 나무 심으러 간 첫날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포대를 양손으로 쥔 후 옆구리로 받친다는 느낌으로 하여 나무의 상대적으로 튼튼한 줄기 부분을 어깨에 기대고 가지들을 뒤로 넘겨 하늘로 치솟게끔 하는 방식이 적절하다. 이러한 방식은 삼삼오오 모여 사면으로 가는 길에서 나뭇가지들이 서로의 얼굴이나 몸에 부딪히지 않게 할 수 있기도 하다.

활동가들이 “나무를 안고 갈 수 있도록 개인용 나무 주머니를 만드는 일은 나무를 현장에 가져다 놓는 일보다 훨씬 손이 많이 간다(김성란 2018: 116)”라고 말하는 것처럼, 봉사자들 역시 사면을 내려가는 일조차 쉽지 않은 상황에서 내가 아닌 다른 무거운 무언가를 직접 들고 가야 한다는 게 부담이 되는 건 당연하다. 그런도 나무를 직접 안고 가는 이 의례적 행위는 지속된다. 반려종의 그물망 속에 참여하기 위해 가장 기본이 되는 돌봄과 호기심이라는 건 이러한 단면으로부터 파생되기 때문이다. 당장 나의 품 안에 있는 묘목을 안전하게 운반하는 일은 내가 안전하게 도착하는 일과 긴밀하게 얽혀 있지만 그 둘이 똑같지는 않다. 나의 몸을 흙탕물로 적시는 묘목 포대는 안는 자세를 바꿔 고치게 하고, 이미 힘 있게 자라있는 나무 아래와 수풀 속을 지나는 건 품속의 묘목의 가지가 부러지지 않게끔 땅에 주저앉게 하기도 한다. 봉사자 K를 옆에서 본 바와 같이 그처럼 자신의 넘어질 것 같을 땐 묘목을 아예 바닥에 내려 두기도 한다. 이는 인간의 몸을 사리기 위해 다른 종의 그것들을 제쳐 둔다는 의미가 아니다. 급한 경사를 인간이 먼저 내려오고, 아래쪽에서부터 묘목을 끌어와 다시 품에 안는 것, 그런 거리와 시간 차 또한 나무와 내가 함께 주어진 상황에 대처해 가는 응답의 실천이다.

봉사자가 나무를 심으러 온 내재적인 동기나 추상적인 목표가 어떠하든 간에 이러한 실천을 수행하는 과정은 그것들을 이뤄나가는 도정에 있는 것이지만, 실천하는 순간 그 자체에 있어선 이런 큰 그림의 문제들은 차치하게 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환원 불가능한 다종 간의 얽힘에 직면했을 때 우리는 “가능한 한 많은 성가신 플레이어들과 물질적으로 얽히기 위한 실천”(해러웨이 2022, 최유미 역: 137)을 하는 것이며, 함께 가기 위한 책임감을 키워나가는 것이다. 이 점을 증명하는 듯, 김성란의 글에서는 다음과 같이 쓴다: “[2016년 11월 24일 처음으로 ‘내가 심을 나무 내가 안고 갑니다’를 시작한] 그날은 심지 않고 남은 나무도, 한꺼번에 심은 나무도, 버려��� 나무도 없었다”(2018: 116).

4. 다종적 조우: 풀정리

2011년까지만 해도 노을공원시민모임에서는 나무 식재와 더불어 ‘유해식물 제거’ 활동을 진행했었다. 생태계교란종인 식생은 어떤 것이 있으며, 어떻게 생겼고, 어떤 방식으로 제거해야 하는지 미리 공부한 후 봉사자들을 이끌어 함께 위해 식물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노을공원이라는 장소와 상관없이 보편적으로 유해식물이라는 개념에 대해 의문을 가질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나무의 천이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았던(또는 둘 수 없었던) 초기 노을공원의 허한 사면을 보며 점점 “쓰레기가 드러나고 흙도 없는 이 땅에 ‘유해식물’로 분류된 식물마저 없애면 왠지 안 될 것 같다”라는 의견이 봉사자들 사이에서 나왔었다며 김성란 박사는 썼다(2018: 32). 누군가가 다른 이에게 ‘유해’한 작용을 입히는 걸 방관해서는 안 되지만, 그렇다고 이미 척박한 땅인 노을공원에서 특정 식물종을 유해하다고 구분 지으며 무조건적으로 제거하는 일 역시 안 된다고 느낀 것이다.

‘어쩐지 그러면 안 될 것 같다’라는 식의 모호한 구석으로 출발한 감각적인 증거는, 오늘날 구체적인 근거로 뒷받침될 수 있음이 명백하다. 연구자들이 나무를 심으러 갔을 적에는 쓰레기가 그대로 드러나 있는 흙에서 나무를 심었던 게 대부분이지만, 한번은 이미 풀들이 허벅지 높이까지 무성하게 자라있는 지면으로 가 나무 식재를 했었다. 당시 우리를 인솔했던 활동가 O는 삽을 들어 거침없이 풀을 꺾어버리면서, 이런 식으로 공간을 확보한 후 쓰러진 풀들 위에서 바로 땅을 파 나무를 심으면 된다고 말했다. 활동가의 안내대로 우리 역시 똑같이 풀을 쓰러뜨리기 시작했지만, 이렇게 마음대로 풀을 ‘죽여버려도’ 되는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질문은 이후 활동가 N과의 인터뷰로부터 해소될 수 있었다.

“그래서 저희 같은 경우는 처음에는 단풍잎돼지풀을 생태 교란종이라 해서 막 제거하고 그랬어요, 많이. (그런데) 여기서 이제 계속 오랫동안을 지켜본 결과 얘네들이 토양을 풍부하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제 저희가 이제 나무를 식재하면서 풀관리 하잖아요, 저희는 최소한으로 사람의 손길로 (관리)하려고 그러는데 얘를 뽑는 게 아니라 어느 정도 자라면 나무를 식재했죠. 우리가 여기서 한 2~3년 정도 씨앗을 해서 파종(시켜요), 그래서 키우면은 보통 한 1m에서 1.5m 정도 되고 그러면 심잖아요. 그러면 이제 단풍잎돼지풀을 그대로 두면 이제 덮어버리잖아요. 그렇죠? 그래서 저희가 이제 식재하고 한 6월부터 9월까지는 단풍잎이 자라면은 나무를 못 덮게 잘라요. 이렇게 무릎선에서.” - 활동가 N

단풍잎돼지풀은 사람들에게 악명 높은 생태계 교란 식물로 알려졌다. 국내 생태계 교란 생물은 ‘생물다양성 보전 및 이용에 관한 법률’에 의거한 생태계 위해성 평가를 거친 후 환경부 장관이 지정 및 고시하는 생물종으로, 현재 총 16종의 생태계 교란 식물이 지정되어 있으며 단풍잎돼지풀이 그중 하나다. 단풍잎돼지풀이 교란종으로 여겨지는 주요 이유는 강한 번식력 때문이다. 토종 식물들이 기존에 자라나고 있는 곳에선 번식이 어렵지만, 맨땅이 드러나게 되면 어마어마한 번식력으로 자라나기 시작한다. 가을이면 엄청난 양의 씨앗을 만들어 주변으로 퍼뜨려 빠른 속도로 지역을 점령한다는 것이다. 지난해 9월 경기도 포천시에서는 단풍잎돼지풀의 꽃가루가 인근 초등학생들과 주민들의 호흡기에 알레르기성 질환을 유발했다는 이유로 수도자원공사에 풀을 제거해달라는 민원을 넣기도 하였다(정다은 2022).

쓰레기 더미를 흙으로만 대충 덮어놓았던 애초의 노을공원은 단풍잎돼지풀이 자라기 가장 좋은 환경이었을 것으로 예상한다. 생태에 관한 지식이 풍부한 활동가는 단풍잎돼지풀뿐만 아니라 많은 ‘생태계교란종’들을 꿰뚫고 있다. 예를 들어, 노을공원에서 자라는 또 다른 국가 지정 교란종 식물인 가시박은 1988년도쯤에 안동오이 대목 용으로 한국에 들여왔는데, 오늘날 사람들이 먹는 수박과 감 같은 과일이 대부분이 대목 용 박에 접붙여서 키웠었다. 하지만 대량생산을 해야 하는 농업 자본의 논리에 따르다 보니 접붙이는 방식은 수지타산이 맞지 않아 가시박이 방치되기 시작하였고, 그 결과로 가시박은 한해살이임에도 불구하고 전국적으로 퍼져 생태계에 엄청난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말한다. 구체적으로 그 악영향이라 함은 가시박의 늦은 발화 시기와 연관이 있는데, 봄부터 늦여름까지 발화하면 이미 자라고 있는 다른 토종 초본과는 5~6m까지 자란 나무도 완전히 덮어버려 광합성을 방해해 굶겨 죽인다는 것이다.

생태교란종에 관한 거의 모든 지식을 체화하고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닌 활동가들이 더 이상 ‘생태교란종’ 또는 ‘유해식물’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는 건 아이러니해 보일지도 모른다. 2013년 중 한때는 ‘유해식물 제거’라는 활동의 명칭을 ‘생태균형저해식물 관리’라는 한층 거시적인 차원의 생태계 균형을 강조하고자 하는 목표가 담긴 이름으로 바꿔 부른 기록을 확인할 수는 있었으나, 그 이후로는 쓰인 적이 없는 것으로 파악된다. 하지만 이 변화는 노을공원의 특수한 배경 아래 오히려 뚜렷한 근거를 가진다: 1) 노을공원에서 이런 풀들은 ‘유해’한 역할을 하지 않고 오히려 생성적인 기능을 하며, 2) 노을공원은 강변북로와 가양대교로 고립된 섬이기 때문에 식물들이 바깥으로 무분별하게 퍼질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다. 특히 단풍잎돼지풀은 다른 어린나무들이 잘 자랄 수 있는 기둥이 되어주기도 하며, 가시박은 햇빛이 강한 여름에 다른 나무들의 그늘막이 되어주어 나무가 상하지 않도록 지켜주는 기능을 한다. 활동가 O가 쓴 것처럼, “풀이 없었다면 어린 참나무는 가뭄과 뙤약볕에서 살아남기 힘들었을 것���다”(노을공원시민모임 2023: 167). 또한 노을공원의 식생이 외부로 나가지 못하거나 그 반대 역시 불가능한 것처럼 흙도 마찬가지로 들어올 길이 없기 때문에 노을공원의 토양은 계속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었는데, 노을공원이 만들어진 30년 역사 동안 이런 척박한 흙 위에서 한해살이인 단풍잎돼지풀과 가시박이 죽고 썩고, 또 죽고 썩고 쌓여가며 토양층을 형성해 왔다. 얽히며 자라는 풀의 뿌리와 쌓인 죽은 풀들의 흔적 덕분에 흙이 쓸려 내려가지 않고 나무들에 튼튼한 토대를 제공해 줄 수 있기도 하다. 따라서 노을공원에서의 유해식물은 ‘왜 제거하지 않는지’보다 ‘왜 제거하는지’가 더 납득하기 어려운 공간이다.

“환삼덩굴은 줄기가 단단하고 거센 가시투성이여서 긁힘에 주의해야 한다. 줄기 밑동을 잘라주고 나무줄기에 엉킨 부분은 그냥 두어도 되지만 잔가지와 잎을 숨이 조이도록 휘감은 경우는 힘들어도 떼어준다. 메꽃은 보기에는 귀엽지만 덩굴식물 중에서 가장 난감한 존재다. 주로 작은 나무를 칭칭 감는데 실타래처럼 감아올라 간다. 그냥 지나치자니 마음이 켕기고 풀어내자니 성가시다. 칡은 나무이면서도 크건 작건 다른 나무줄기를 감고 올라가서 통째로 덮는다. 큰 나무를 타고 오른 칡은 밑둥만 잘라주는 정도로 정리하고 위쪽은 그대로 둔 채 마르게 하면 된다.” (노을공원시민모임 2023: 168)

무성한 풀 속에서 어린나무가 광합성을 할 수 있도록 꺼내주는 행동은 결국 다른 풀들을 죽이는 일이기도 하다. “복수종 공동의 번영은 동시적이고 모순적인 진실들을 필요로 한다”(해러웨이 2022, 최유미 역: 136). 시민모임은 이것을 진실로 받아들이기 위해 죽이고 있지만, 그 죽음을 너무나 쉽게도 정당화 해버리는 ‘유해종’이라는 용어 뒤에 숨어서 죽이는 행위를 무고하게 만들지 않는다. 활동가들은 ‘인간이 중요한 타자, 즉 단지 반응만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응답하는 자를 죽일 필요성에 대한 허가증을 가지고 있지 않는다는 점을 실제로 이해’한다(해러웨이 2022, 최유미 역: 104). 이것은 ‘죽이지 않는 것’보다도 더 근본적인 이야기이며, 그러한 점에서 이런 죽임의 실천이 공원을 관리하는 사업소나 경제림의 행동과 차별화될 수 있다.

2017년 여름, 시민모임이 봉사자들과 함께 길가에 심었던 어린 참나무가 사업소에 의해 전부 베어져 버렸다(김성란 2018). 공원의 길을 깨끗이 만들기 위해 필요 없다고 여겨지는 식물을 제거해버린 것이다. 그들이 인간 활동 지역 조성을 위해 간벌하는 일에는 “풀을 없애면 풀 벌레는 어디로 가나? 흙이 마르는 것은 어쩌나? 베어내고 뽑아낸 풀 때��에 흙 속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노을공원시민모임 2023: 167)와 같은 물음표를 던질 여지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활동가들은 어린나무가 스스로 풀과 함께 자랄 수 있는 정도의 어른 나무가 되면 풀 정리를 중단한다. 모든 유기체는 유한하다는 점을 인정하기 때문에 특정한 형식의 삶을 지지하는 그들만의 세속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으면서, 다른 패턴들을 가진 종과 종이 마주할 때의 복잡성에 깊이 공감하고 참여하��� 있기 때문에 시민모임은 존중이 가득한 최소한의 보살핌을 지향할 수 있게 된다. 응답-능력은 이런 아이러니를 지탱할 수 있는 힘인 것이다.

(원래의 연구보고서에선 '풀정리' 말고도 아래 두 가지 사례를 통해 '다종 간 조우'를 설명하나, 포스트의 길이 상 본고에선 삭제하였습니다. 내용이 궁금하다면 아래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III. 재야생화와 다종 간 연결의 가능성

1.생태계 그물망

노을공원은 인간이 쌓아 올린 쓰레기산 위에서 조성된 특수한 환경으로 인해 다양한 수종의 나무들이 자라기 힘들고 기존의 생태학적 지식이 가정하던 ‘자연스러운’ 숲의 천이 과정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특히 아까시나무 군락으로 인해 참나무를 비롯한 잠재 자연식생이 유입되지 못했고, 인위적인 개입은 불가피했다. 시민모임은 이러한 환경 속에서 더 많은 종들을 도입하며 생태계의 그물이 활성화되도록 하고 있다. 노을공원 상부 나무자람터에서 나무들을 가식하여 사면에 심을 나무들을 돌보고 있는데 단풍나무, 산초나무, 쉬나무, 꾸지나무, 미선나무, 쥐방울덩굴, 참나무, 가래나무, 산뽕나무, 헛개나무, 느티나무 등 그 종류가 매우 다양하며, 나무뿐만 아니라 초본을 이루는 토종 풀들 또한 함께 돌보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노력에 따른 영향은 명확하다. 새로운 종의 나무를 도입함으로써 그와 연관된 다른 생명체들의 유입을 촉진하는 것이다. 다음은 활동가 N의 파종 경험에 관한 지문이다.

“우리가 탱자나무 아예 없었는데 재작년 파종해서 탱자나무 저기 노상에 2개 만들어놨거든요? 작년 재작년에 호랑나비 원 없이 봤어요. (...) 저 식물 하나가 엄청 큰 거예요. 보통 식물 하나가 예를 들어 우리 참나무 도토리나무는 기본 대략 한 180종 정도 곤충들하고 관계를 맺고 있어요. (...) 해마다 모니터링을 조금씩 해나가는데 엄청 풍부해지고 있어요. 지금 식물은 한 700여 종. 제가 해마다 할 때 어떤 때는 깜짝깜짝 놀라요. 저쪽에 세줄 고사리도 보고 여기에는 양치식물이?!” - 활동가 N

나무자람터에 심어진 탱자나무는 다양한 종과 먹이 그물로 연결되어 있었다. 탱자나무를 먹이로 하는 호랑나비들이 몰려들었고, 호랑나비가 나타나자 호랑나비의 벌레에 알을 낳아 기생시키는 두색맵시벌 또한 등장했다. 애벌레가 많아지자 애벌레를 먹이로 하는 새들도 노을공원에 살게 되면서 현재 노을공원에서는 오색딱따구리와 청딱따구리도 볼 수 있게 되었다. 탱자나무 하나로 수많은 종이 찾아오고 더욱 촘촘한 생태계가 만들어졌던 것이다.

2. 그물망 속 인간의 위치

여기까지만 본다면 인간의 개입이 노을공원 생태계 조성에서 우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노을공원은 인간과 떼어 생각할 수 없으며, 인간도 노을공원 바깥에 있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이미 지금 이 순간의 노을공원이라는 상황 속에 놓여있는 것이다. 따라서 질문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 ‘인간’이 ‘자연’에 얼마나 개입해야 하느냐는 보편적인 언어가 아니라, 지금 여기의 상황 속에서 인간은 무엇을 할 수 있고 또 무얼 해야 하느냐는 맥락적인 언어로 전환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라면, 인간이 숲에 끼치는 영향력이 어느 정도냐는 질문 또한 무의미해진다. 숲 자체에 이미 인간이 속해 있고, 인간의 ‘영향력’ 또한 숲이라는 그물망 속에서 관계적으로 부여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회복이라는 것도 좀 단어가… 사람이 보는 회복의 개념이지. 저희가 이제 최소한의 손길로 조금씩 더해주는데 저희가 더해주는 건 극히 일부에요. 예를 들어, 그냥 탱자나무 하나만 심은 거예요. 자연이 알아서 어떻게 알고 호랑나비 낳으려고…그다음에 저쪽에 쥐방울덩굴이라고 있어요. 근데 우리 꼬리명주나비 사양 제비나비 이런 애들이 찾아와요. 하나 심어놨을 뿐인데. 스스로가 그게 더 큰 거예요. 우리가 나무 심는 게 그거 진짜 이만한, 이만한 거 하나를 살짝 이렇게 보태준 거라고 생각해요.” - 활동가 N

“근데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개인적으로 전문가는 아니지만 99.8%를 자연이 해요. 0.2% 정도를 사람이 한다고 보면… 저는 그렇게 봐요. 우리의 역할을 그냥 0.2% 이하다. 자연이 98, 99.8% 이상을 한다고 저는 그렇게 봐요. 이렇게 심어봐야 이거 얼마 안 되거든요. 근데 이렇게 저 안에 들어가 보면 이미 일어나 있고 우리가 이렇게 하는 것들이 약간은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요.” - 활동가 O

노을공원에서 인간의 영향력을 묻는 연구자들의 질문에 활동가들은 답을 머뭇거렸다. 이들은 근본적으로 인간과 숲을 분리하지 않고, 인간이 숲 바깥에서 숲을 마음대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시민모임의 실천들은 숲에 대한 착취도 숭배도 아닌, 상황 속에서 끊임없이 만들어 가는 ‘응답’의 과정이다. 위의 답변에서 활동가들은 공통적으로 자연의 자생력을 인간의 행위보다 우위에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언뜻 보기에는 인간의 역할을 축소하고 자연의 위대함과 힘을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인간의 역할이 “0.2%”에 불��하다는 연구참여자 O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활동 없이 노을공원이 현재의 모습이 되었으리라 상상하기는 힘들다. 동시에 인간의 활동이 없는 상황을 상상하는 것 자체가 노을공원에서는 이치에 맞지 않는다. 사면이 인간에 의해 출입금지구역이 된 것처럼, 인간을 숲에서 배제하는 것도 인위적인 선택의 결과인 것이다. 시민모임은 다양한 복수종들을 숲을 함께 변화시켜 가는 파트너로 바라본다. 시민모임은 꽃가루를 수분하는 벌들을 도입하기 위해 벌통을 설치하기도 했는데, 여기서 인간의 역할을 “0.2%”와 같은 식으로 명료하게 판단할 수 없는 이유는 이후 벌어질 수 있는 벌들의 수분으로 인한 숲의 변화가 인간과 벌과 벌통, 그리고 수많은 복수종들에 의해 벌어진 합작품이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동물물그릇은, 매우 제한된 조건이지만 그런데도 노을공원에서 자생할 수 없던 수생식물들이 살아갈 수 있는 터전을 만들어줬다. 또 다른 방법은 나무를 식재할 때 물을 주기 위한 용도로 사면 곳곳에 설치된 왼쪽 사진과 같은 레인팟(rainpot)를 이용하는 것이다. 레인팟은 본래 물그릇의 용도로 쓰이지 않았으나 노을공원에서 보기 힘든 물을 찾아 레인팟를 방문한 동물들이 레인팟 통에 빠지는 경우가 늘어나면서 익사할 위험 없이 물을 마실 수 있도록 고안되었다. 물탱크의 뚜껑을 뒤집어 오목한 부분에 물이 고이도록 하는 방식으로, 그 깊이가 3~5cm 정도 되어 매우 얕다.

상부의 경우 사면보다는 비교적 물의 배수가 더딘 편이다. 따라서 사면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인공연못이 만들어졌다. 연못의 탄생 비화에 관한 이야기는 한 봉사자로부터 시작된다. 봉사자는 삽 한 자루로 적당한 공간에 땅을 파고 도랑을 만들어 빗물이 연못으로 흐르도록 물길을 텄다. 고무통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물이 잘 새지 않도록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는데, 마치 떡메로 떡을 찧는 것처럼 삽으로 땅을 다져 공기층을 없애 물이 잘 새지 않도록 했던 법이 가장 적절했다. 흘러들어온 빗물만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에 활동가들이 물이 주기적으로 연못에 물을 채워 주었고, 그 과정에서 각종 수생식물은 자생하기 시작하고, 청둥오리, 고라니 등이 찾아오게 되었다. 연못에서 자란 갈대, 부들 등의 수생식물은 기존에 존재하지 않았던 생물종의 유입을 촉진했다. 연못을 중심으로 두꺼비, 맹꽁이, 참개구리, 북방산개구리, 옴개구리, 무당개구리를 비롯한 양서류가 서식하게 되었고, 이들을 먹이로 하는 유혈목이, 살모사, 쇠살무사, 누룩뱀, 장지뱀, 도마뱀 등이 등장했다. 잠자리 애벌레인 수채는 올챙이를 잡아먹으며 성장했고, 잠자리로 우화(羽化)하게 되면 개구리에게 잡아먹히는 먹이그물이 만들어졌다. 이 모든 과정을 매일 직접 관찰한 활동가들이 인간의 영향을 아주 작은 것으로 묘사한 것은 ���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이 과정 속에서 인간의 영향과 고무통의 영향, 갈대와 부들과 두꺼비와 잠자리의 영향을 분리하여 무엇이 더 크고 작다는 식으로 생각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무자람터 한 구석에 사람의 힘으로 만든 연못 주변에는 수생식물이, 물 속에는 개구리와 ���자리 등 각종 동식물이 자라고 있다.
3. 생태적 실험과 변화하는 지식

노을공원의 공원화는 크게 두 세력에 의해 진행되고 있다. 노을공원의 상부를 담당하는 서울시 산하의 사업소, 그리고 상부 일부와 사면을 담당하는 시민모임이 그것이다. 이 둘의 차이는 극명한데, 사업소의 경우 숲을 빠르고 효율적으로 조성하려는 입장인 반면, 시민모임의 경우 느리더라도 ‘건강한’ 숲을 조성하려는 의지가 강한 편이다.

“사업소에서 나무도 심어요. 그분들은 어떻게 심냐고 그러면 거의 다 자란 나무를 가져와. 거의 한 4~5년 된 이런 나무를 가져와. 그리고 거대하게 구덩이를 파. 그리고 심고, 비료 엄청 주고. 지주대 다 세워주고. 이런 식으로 심고 있어요. 일렬로 줄 딱 맞춰가지고 수종도 같이 나란히 단수종으로 쫙쫙 해가지고. 그런데 저희는 그렇게 안 하잖아요. 그건 정말 (...) 생태를 고려하지 않고, 그리고 심는 것도 되게 우리 토종이 아니라 소위 말하면 도입종들을 많이 심어요. (그 큰 나무, 4, 5년 된 큰 나무를 가지고 와서 그걸 구덩이를 크게 파서 심으면 구체적으로 어떤 식으로 문제가 생기는 건가요?) 문제라기보다는 여기 생태를 전혀 고려하지 않죠. 가장 기본적인 생태계가 식물인데, 우리나라 생태계에 구축되어 온 걸 갑자기 외국 식물이 딱 들어오면 얘네들이 (...) 그거랑 똑같아요. 황소개구리 왔을 때 황소개구리 천적이 없었잖아요. 황소개구리가 막 뱀도 잡아먹고 막 그랬었잖아요. 근데 이제 지금은 오랜 세월이 지나가서 이제 그나마 이제 뱀이랑 쏘가리가 이제 먹어도 되는 걸로 인식을 해서 지금 이제 많이 이렇게 이제 개체들(황소개구리)이 줄어들지만, 초창기 때는 그냥 황소개구리가 지나가도 뱀들이나 얘네들이 소갈이나 수달들이 그냥 지켜만 봤어요. 이미 이렇게 구축된 생태계가 쭉 유전자 속에 들어있는데 느닷없는 놈이 들어오니까 모르죠. 먹이인지 인식을 못 하는 거지. 이것도 마찬가지. 가장 기본적인 생태, 기본인데, 그 관계들이 딱 이렇게 구축이 돼 있는데… 그게 가장 크죠.” - 활동가 N

재야생화 논의에 있어 생태학적 부분에 대한 시각은 아직까지도 의견이 분분한 상태이다. 외래종을 도입하는 것에 대한 부작용을 우려하는 입장이 있는 한편, 외래종의 도입이 일시적인 교란 상태에 빠지게 할 수는 있어도 안정화가 이루어진 후에는 오히려 생태계의 생물다양성을 높인다는 입장도 있기 때문이다. 시민모임의 경우 전자의 입장에 가까운 것으로 보이는데, 이러한 시각은 생태계에 대한 지식과 앎에서 파생된 민감성에서 비롯된다. 여기서 앎이란, 비인간을 행위자로 인식하고 생태계의 여러 종들이 긴밀한 관계성을 갖고 있다는 점을 인지하고 있음을 뜻한다. 그 때문에 하나의 새로운 종이 기존의 생태계에 도입되었을 때 파문처럼 번져나갈 영향력을 고려하는 것이다. 이는 토종나무만을 고집하는 이유와도 연결된다.

“사람이 국경이지 식물은 아니에요. 자기들 분포대가 대부분은 이제 위도로 따져요. 우리 남방한계선, 북방한계선 많이 들었잖아요. 그래서 중국에도 있고 우리나라도 있고 일본에도 있고 그런데 고유종 같은 경우는 이제 우리나라(에)만 있는 애들. 걔네들이 이제 서식 환경이 아주 극히 작은… 좀 협소한 거지.” - 활동가 N

노을공원이 예측할 수 없는 숲 생태계라는 점을 인정한 덕분에, 공원은 실험의 장이 될 수 있다. 실험을 통해 노을공원의 변화를 관찰하여 적합한 방식을 찾아 나가는 것이다. 이는 숲을 이루는 다양한 생명체들을 존중하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활동가들은 실험을 통해 노을공원의 환경적 특수성에 맞게 숲 조성의 방향성을 조정하며 노을공원에 가장 적합한 방식으로 숲이 형성되도록 한다. 씨앗 채종부터 보관, 파종에서 관리까지의 과정에서 씨앗부터 키우기의 비율을 높이고, 토종 식물 확보에 가장 적합한 방식을 찾기 위해 꾸준히 실험을 해오고 있다.

4. 숲이라는 공간

“이 안에 있는 나무들 씨앗들을 동물들이 옮겨 가지고 이제 다른 나무들이 생기면서 천이가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거는 좀 부족하거든요. 그래서 저희가 여기에 없는 나무, 여기는 참나무, 다람쥐가 없기 때문에 참나무 도토리를 옮기는 동물이 없어요. 그 역할을 우리가 하죠. 여기에 없는 나무들, 우리가 심는 나무들 그런 거 대부분이 좀 여기에 자생했으면 하는 나무들이거든요. 그래서 천이를 좀 돕는다는 의미.” - 활동가 O

활동가 O는 노을공원에서 인간의 역할을 다람쥐에 비유한 바 있다. 다람쥐는 도토리를 주식으로 하며 이를 섭취하기도 하지만 의도치 않게 도토리를 여기저기로 옮겨 참나무가 퍼질 수 있도록 돕는다. 그러나 이런 역할을 담당할 동물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노을공원에서는 인간 행위자가 그 역할을 하며 생태계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시민모임의 봉사자들을 지칭하는 ‘인간다람쥐’라는 이름은 이렇게 생겨났다. 시민모임의 나무 심기 활동과 씨드뱅크 활동을 통해 다양한 씨를 파종하는 활동 등이 대표적인 사례가 될 것이다. 초창기 시민모임을 찾는 봉사 유형은 기업봉사의 형태가 많았는데, 당시의 노을공원은 천이가 아직 진행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회사별로 나무를 심는 구역이 자연스럽게 나누어지게 되었다. 이때 등장한 프로그램이 ‘씨앗부터 키워서 100개 숲 만들기’로 각 구역마다 활동에 참여한 회사의 이름표를 달아주기도 했다. 당시 노을공원은 아까시나무 군락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아까시나무조차 자라지 않는 곳부터 나무를 심기 시작했다고 한다. ���민모임은 지금까지 약 164개의 회사에서 후원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의 참여로 만들어진 숲 조성지의 절반 이상이 더 이상 사람이 집중적으로 나무를 심지 않아도 되는 곳으로 변했고 숲과 숲이 연결되어 여러 권역이 하나로 묶이는 변화가 일어났다. 인간이 권역을 나누는 의미 자체가 점차 퇴색되고 있는 것이다. 권역별로 분리된 숲의 개수를 늘리는 일이 무의미하다는 판단에, 활동명 또한 ‘씨앗부터 키워서 1002(천이)숲 만들기’라는 이름으로 바뀌게 되었다. 현재는 따로 떨어진 권역을 사잇길로 잇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는데, 그 모양이 개미집처럼 보여 다시 ‘씨앗부터 키워서 개미숲 만들기’라는 활동명으로 바꾸게 되었다. 이러한 시민모임의의 활동 방향에 동참하는 봉사자들이 활동에 참여하면서 ‘인간다람쥐’들은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활동가 N은 연구자들이 노을공원을 방문할 때마다 노을공원에서 나고 자란 식물들을 맛보게 했다. 어느 날은 하나 남은 버섯을 잘라 나누어주었고, 어느 날은 둥굴레의 잎을 조금 뜯어 내어주었다. ‘꽃을 꺾으면 안 된다’와 같은 보편적 윤리 준칙은 시민모임에게 무의미하다. 이들의 윤리는 주어진 상황 속에서 적용되는 ‘응답’의 윤리에 가깝다. 다람쥐가 도토리를 옮기면서 동시에 도토리를 먹기도 하듯, 시민모임은 숲에서 무언가를 취하는 일을 거부하지 않는다. 이들은 숲 밖에서 숲을 관리하는 게 아니라 숲 안에서 그곳의 복수종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노을공원에서 벌어지는 재야생화는 이러한 일상적 삶의 단면들이 모여 진행되고 있는 과정이며, 숲이라는 공간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삶의 터전이자, 동시에 그 삶에 의해 변화하고 있는 생성적 공간이다. 재’야생’화라는 표현과 달리, 노을공원의 숲은 인간과 비인간 존재들 모두를 포괄하고 있어야 한다. 이 모두에 의해 숲은 변화하고, 숲은 이들을 다시금 변화시킨다.

결론: 연구 의의

포스트휴머니즘의 관례에서 ‘복수종’이라는 표현은 ‘비인간’ 또는 ‘인간을 넘어선 문화(more-than-human)’라는 직설적인 말과 동일시됐고, 연구자들 역시 문제 제기와 이론적 논의를 진행할 때는 ‘비인간 문화’라는 말을 자주 차용하며 그것에 초점을 맞출 수 있으리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갈수록 ‘비인간’이라는 단어는 어색하게 들렸다. ‘비인간’이라는 용어의 생김새 자체가 인간과의 대칭을 불가피하게 만든다. 그러나 인간의 영향을 받은 ‘비인간’은 인간과의 상호작용을 멈추지 않기 때문에 비인간 문화 연구와 인간 문화 연구는 떨어져서 기술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 존재성의 유무’라는 경계선으로 세계의 구성을 구분 짓는 것은 유효하지 않을 수 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처럼 노을공원은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공간과 시간의 제약 아래 있으면서도 “위도 아래도 중심도 외곽도 없다”(노을공원시민모임 2023: 161).

다종민족지는 ‘생존하는 동물 타자’를 긍정적인 논조로 등장시킴으로써 마치 환경파괴에 대한 우려를 은폐할 수 있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또한 세상을 구성하는 데에 있어 인간의 영향을 축소하는 시선은 인간이 여태껏 다른 종들에게 미쳐왔던 권위적 관계를 문제 삼길 포기한다는 비판도 있었다(황희선 2021). 하지만 본 연구를 통해 밝힐 수 있던 것은 미래에 대한 그저 희망적이기만 한 대안도, 비인간에 대한 인간의 영향을 축소하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라면 더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복수종들이 가진 물질성은 인간의 미래에 셀 수 없이 많은 변수로 작동하지만, 그런데도 인간은 여전히 더 많은 쓰레기를 버리고 더 많은 다른 종들을 죽일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이런 아이러니를 가로지를 수 있는 유일한 전제는 ‘생명의 유한성’이다. 모든 종은 유한하기 때문에 세속적일 수밖에 없으며, 이런 세속성을 물질로써 받아들일 때야말로 다종 간 협작의 최소단위를 발견할 수 있었다. 다른 종이 가진 고유한 탁월함과 깊이에 관계 맺기 위해선 서로에게 관심을 갖는 것뿐만 아니라 다른 종이 ‘나’에게 쏟는 관심을 느끼고,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고, 오랫동안 지켜보고, 유념하며 보살피는 일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과정 속에서 서로에게 표할 수 있는 가장 큰 존중이 때로는 가만히 있는 것이고, 때로는 크게 행동하는 것이라는 점을 교차적으로 이해하며, 그런 교차성은 실천 그 자체로 비롯된다는 걸 기억해야 한다.

다시 활동가 O의 말로 돌아가서 생각해보자. 숲이라는 그들만의 세계를 구성해 가는 데에 인간이 미치는 영향력은 0.2%, 다른 종의 영향력이 99.8%라는 말은, 자연문화적 배경 아래 인간이 99.8%, 다른 종이 0.2%라는 말과 똑같아질 수도 있다. 자연의 9할이 연결되어있어도 그걸 가능하게 하는 나머지 1할만큼의 인간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노을공원은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고, 인간이 9할만큼의 개입을 했을 경우에 나머지 1할을 자연이 연결해주지 않는다면 지금의 노을공원은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사고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사실 100%라는 정량 자체가 고정되어 있지 않는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자연도 문화도 아닌 ‘자연문화’라는 것이 새로운 제3의 문화라고 한다면 우리가 그것을 향해 나가는 것이라 말할 수도 있지만, 사실 자연문화 개념의 요지는 그보다 더 원초적인 시각으로 다종적 관계가 출연하는 방식 자체의 다양성을 파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숲을 만들어 가자고 얘기하기 이전에 이미 우리가 자연의 일부라는 걸 상기시킬 수 있다면 ‘자연스럽다’는 말도 필요가 없어진다. 인간을 인간다람쥐로, 다람쥐를 생태적 기술자로 상상하는 능력은 분명 인류세의 위기에 다른 접근법을 제공해 준다.

본 포스트는 2023-1학기 문화기술지(ANT2101) 수업에서 이루어진 연구를 바탕으로 제작하였습니다. 포스트에 활용된 모든 사진은 연구자들이 직접 촬영 및 편집하였음을 밝힙니다. 문의 사항이 있을 경우 박진리(문화인류학과/qkrwlsfl00@gmail.com), 구도희(영어영문학과, 문화인류학과/mydhkoo1@yonsei.ac.kr), 김유현(문화인류학과/gmyuhyeon@yonsei.ac.kr), 김예랑(역사문화학과, 문화인류학과/tnsrks_22@yonsei.ac.kr)로 연락 바랍니다.

자 이제 글 다 썼으니 다시 나무 심으러 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