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신준범 취재팀장 jbshin@chosun.com / 사진 민미정(유튜브@outsider_min)
1박2일 8km 둘레길 여행과 깃대봉 4km 산행
“덤불과 뱀 조심해야 해.”
시골에서 자주 듣는 말이었기에 대수롭지 않게 “네”라고 지나치듯 답했다. 흘려들어서는 안 되는 이야기임을, 어둠이 내리고서야 도망치듯 숲을 빠져나오며 실감하고 있었다. 둘레길을 얕본 것을 후회하며 헤드랜턴 빛에 의지해 마을로 돌아왔다. 살모사의 “쇄애액”하는 소리가 아직 귓가에 울리는 것 같아 몸서리쳐졌으나, 가시에 긁힌 일행들의 상처 확인이 우선이었다.
물 많아 물갑, 문갑 닮아 문갑
인천연안여객선터미널은 평소보다 활기가 넘쳤다. 역시 여름이었다. 등산 유튜버인 서정윤(산타윤)씨와 산행·암벽등반을 즐기는 인플루언서 조미옥(@miok_jo_)씨가 8월의 주인공이다. 온돌방 객실은 사람이 많았으나, 앉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덕적도에서 배를 갈아타고 다시 바다로 나섰다. 갈수록 파도가 거칠어, 먼 바다에 온 것이 실감났다.
옅은 안개 사이로 검은 선이 꿈틀거렸다. 문갑도 깃대봉 능선이었다. 작은 섬인줄 알았는데, 능선의 실루엣이 예상보다 컸다. 검은 선의 흐름에 거친 기운이 실려 있었다. 복선처럼 드러난 깃대봉이었으나 여전히 200m대 섬산으로 얕보고 있었다.
예약한 민박집까지 700m 거리인데 어르신이 트럭으로 마중 나와 있었다. 펜션이 아닌 민박은 오랜만이었다. 자상한 노부부의 집에 짐을 풀었다. 친절한 할머니 집밥을 먹는 것만으로 다들 기분이 좋아졌다. 먼 섬에서 8,000원 백반을 가정식으로 주는 것도 놀라웠지만, 정갈하며 맵거나 짜지 않고 균형이 잡혀 있었다.
식사 후 등산화 끈을 묶었다. 대표 명소인 한월리해수욕장을 찾았다. 700m를 걸어 작은 언덕을 넘자 길이 끝나는 곳에 해변이 숨어 있었다. 자연 그대로의 해변은 오늘 우리가 첫 손님이었다. 그 흔한 매점이나 카페 하나 없이, 깨끗한 모래와 소나무 숲이 전부인 게 오히려 좋았다.
해변 안쪽에 보석 같은 소사나무 그늘이 있다. 텐트 한 동 치고 한나절 쉬었으면 좋겠다 싶은 때에, 블랙야크 김정배 이사가 배낭에서 텐트를 꺼낸다. 여럿이 달라붙어 텐트 치고, 테이블 펴고, 캠핑용 의자를 조립한다.
20여 분 만에 동남아 해변 휴양지 부럽지 않은 캠핑장이 만들어졌다. 잠깐 의자에 앉아 해변의 고요를 느낀다. 귓불을 스치는 바람, 반복되는 파도 소리, 빛나는 햇살의 파편들. 해변의 정적은 알고 보면 바쁘다.
문갑도文甲島는 선비의 책상인 문갑文匣을 닮아 한자는 다르지만 지금의 이름이 유래했다고 한다. 문갑도는 비탈진 산이 대부분이었으나 계곡에 물이 많아 물갑도란 별명이 있었다. 물이 부족한 대부분 섬과 달리 일부 경작지에선 논농사를 했을 정도.
과거 1960~1970년대에는 새우가 넘쳐나 주민이 1,000명을 넘긴 적도 있었다. 잡은 새우는 문갑해변과 한월리해변의 저장고로 옮겨 새우젓으로 숙성했는데, 보관을 위한 장독 공장 수준의 가마도 2곳이 있었다.
그러나 새우가 고갈되고, 양철 드럼통이 유통되면서 장독 가마의 불씨도 꺼지며 내리막을 타 지금은 인구 70여 명만 남았다.
한월리해변 앞에는 할미염이라는 작은 바위섬이 있는데, 이야기가 전한다. 과거 서해안과 황해도 일대의 섬에선 마을의 안전과 생업의 번창을 기원하는 대동굿을 올렸는데, 출산이 임박한 여성이 있으면 부정 탄다고 하여 이곳에 초막을 지어 보냈다. 여기서 태어난 아이를 ‘할미염네’라고 불렀다고 한다.
1,000년의 싸움 쌍사자바위
짧은 해변 촬영을 마치고 민박집으로 돌아가 산행 채비를 한다. 문갑도 둘레길인 해누리길 1~4코스를 따라 섬을 한 바퀴 도는 여정에 나선다. 민박집 어르신이 떠나는 우리를 불러 세워, 덤불과 뱀을 조심하라고 슬그머니 일러준다.
마을 입구의 예쁘장한 호수 데크인 유수지공원을 지나자, 소박한 성당이다. 천주교 공소로 일주일에 한 번 미사가 있을 때만 신부님이 찾아온다. 이 작은 섬에 세 개의 교회가 있는데, 감리교와 장로교다. 당집도 있었는데 몇 년 전 만신이 눈을 감으면서 없어졌다고 한다. 감리교인 문갑교회는 1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지만 신도는 10여 명으로 단촐하다. 1964년 세워진 천주교 공소는 신자가 8명, 장로교인 구원교회는 신도 4~5명 정도로 알려져 있다.
시멘트길을 따라 언덕을 넘자 산길 사거리인 어루재다. 산세가 작지 않아 신중을 기해 방향을 잡는다. 이후 갈림길이 나올 때마다 문제 풀이하듯 방향을 해석해 사자바위 갈림길에 닿았다. ‘문갑8경’이라 하여 섬 볼거리를 마을에서 선정했는데, 가장 보고 싶었던 것이 사자바위였다. 바다로 난 숲길을 빠져나오자 햇살이 작열하는 바위가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었다.
바위를 따라 내려서자 바다를 향해 포효하는 사자가 있고, 20m 너머에 사자가 또 있다. 두 마리 사자가 바다를 향해 으르렁거리는 형상이라니. 무언가를 닮은 바위는 많지만 둘이 똑같이 늘어선, 쌍사자바위가 풍화로 만들어질 확률이 얼마나 될까? 파도는 오늘따라 왜 이리 거친지, 폭탄 터지듯 “펑! 펑!” 소리를 내며 몇 미터씩 튀어 올랐다. 실로 사자와 파도가 서로 으르렁 거린 싸움이 수 백 년, 아니 수 천 년을 이어왔을 터다.
둘레길로 돌아와 시계 방향으로 진행하는데, 길이 점점 희미해진다. 둘레길을 알리는 표시는 되어 있는데, 풀이 지나치게 높다. 고즈넉한 섬답게 둘레길을 만들었으나 찾는 이가 드물어 다시 자연 숲이 되었다. 처음부터 거칠었으면 되돌아 나갔을 텐데, 둘레길은 천천히 거칠어진다.
산꾼들 자존심도 한몫했다. 김정배 이사와 기자가 번갈아가며 러셀하듯 선두를 교대했다. “퍽! 퍽!” 소리가 나도록 스틱으로 가시덤불을 헤치며 걸었다. 어떤 곳은 한 2m 높이까지 빼곡히 덤불이라 “헉”하는 소리가 절로 튀어나왔다.
이중삼중으로 덤불이 앞을 막다가도 다시 걸을 만한 길이 되길 반복했다. 엄나무가 특산인 섬답게 도깨비 방망이의 무자비한 가시가 난무했다. 땅바닥엔 간간이 뱀이 있어 긴장감은 갈수록 절정으로 치달았다. ‘100m 걷기가 이토록 힘들 줄이야’ 싶었으나, 되돌아가기엔 늦었다. 둘레길치곤 오르내림이 커서 최대 100m 이상 고도를 올렸다 내리기도 했다.
똬리 틀고 덤비는 독사
해넘이 명소로 알려진 진모래해변에서 노을을 보려고 했으나, 시간이 초과되어 야간산행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모처럼 나는 물소리는 둘레길의 명소인 연못골폭포. 여름 무더위와 개척산행에 달궈진 몸을 폭포 안에 풍덩 밀어 넣어 10m 높이에서 떨어지는 폭포수를 그대로 맞았다. 소의 깊이는 무릎 정도, 폭포수는 아프지 않을 정도였으나 차갑기는 이루 말할 수 없어 달궈진 몸과 정신에 곧장 반전을 가져왔다.
예상 못한 둘레길 개척으로 지친 몸에 다시 활기가 돌았다. 어렵게 진모래해변 갈림길에 닿았으나 저녁 7시를 넘은 시간, 누구도 해변에 들르지 않는 것에 이의를 달지 않았다. 비로소 스틱으로 쳐낼 필요 없는 산길이었으나, 꽤 가팔랐다. 모두가 말없이 숨을 몰아쉬며 악전고투로 진고개를 넘었다.
어둡지만 비로소 편한 내리막인가 싶은데, 뱀이다. 스틱으로 땅을 몇 번 쳤으나 도망가질 않는다. 좁은 등산로 가운데에 똬리를 틀더니 영화 속 코브라처럼 몸을 새워 “쐐애액”하는 소리를 낸다. 김정배 이사가 달려와서 스틱으로 뱀을 숲으로 던져버린다. “원래 살모사는 공격성이 강해 도망치지 않는다”며 스틱으로 땅을 두드려봤자 소용없단다.
덤불에 긁히고 찢긴 일행은 저녁 9시가 되어서야 패잔병 같은 몰골로 돌아왔다. 우리를 기다려준 할머니의 맛있는 식사와 시원한 샤워 덕분에 일행들의 분위기는 다시 명랑해졌다. 언제 그랬냐는 듯 “힘들었지만 잊을 수 없는 재밌는 경험이었다”며 웃으며 맞장구치고 있었다.
다행히 아침이 되어도 몸이 불편한 사람은 없었다. 후반전으로 BAC 인증지점인 깃대봉 정상을 향해 나섰다. 어제 당한 게 있어 조심스럽게 산을 오르고 길찾기를 했으나 기우였다. 깃대봉 산길은 인증지점답게 정비가 잘되어 있어, 고속도로였다. 여간한 오르막도 덤불이 없다는 것만으로 감사히 올랐다.
처녀바위에 올라서자 시야가 트이며 굴업도가 나타났다. 순둥한 곡선의 굴업도는 해무 속에서 흘러가고 있었다. 오늘도 산에는 아무도 없이 고요했다. 주민들도 하나같이 말을 나긋하게 하고, 인심이 넉넉했다. 엄나무가 특산품이 아니라 평화가 특산품인가 싶었다.
정상은 덕적군도에서 첫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시원했다. 데크 전망대는 가운데에 구멍을 낸 듯 바위 정상의 자연미를 살린, 독특한 모습이었다. 맞은편에 이름만 들으면 형제 섬격인 선갑도가 불끈 힘센 산세를 과시하고 있었다.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게임’ 배경이 된 무인도이고 산세가 독특한 바위산이라 한 번쯤 가보고 싶었다.
하산길, 어제의 탈출에 가까웠던 산행과 달리 빛이 가득했다. 산길을 나와 마을로 들어서자, 마을 이장님이 웃으며 맞아주었다. 농사를 짓는 와중에 가서 먹으라고 한 움큼씩 열매를 나눠주었다.
민박집 할머니가 해주는 맛있는 점심을 먹고, 마당 의자에 앉았다. 할머니가 키우는 노란 새끼 고양이가 허벅지 위에 올라타 등반을 하듯 발랄하게 오르내렸다.
구름 흘러가는 것만 멍하니 보았는데, 시간이 훌쩍 흘러 있었다. 어디선가 나비가 팔랑팔랑 날아와 어깨에 내려앉았다. 문갑도 특산품인 평화가 마음에 내려앉고 있었다.
섬 여행 가이드
보통 섬산은 길찾기 쉽고 단순하다 여기지만, 깃대봉은 갈림길에서 주의해야 한다. 갈림길마다 등산안내도와 이정표가 있으므로 참고해야 한다. BAC 인증지점은 깃대봉 정상이다. 마을 입구의 유수지공원 데크를 따르면 문갑도성당이 나오고, 여기서 임도를 따라 올라가면 사거리 안부인 어루재가 나온다. 선착장에서 이어진 산길과 어루넘어해변, 진뿌리 방향으로 나뉘는데 호망재 방향으로 가야 한다.
처녀바위전망대가가 있는 봉우리를 화유산, 정상을 깃대봉, 진고개 방면 봉우리를 왕재산이라고 한다. 봉이 산의 하위 개념이지만 주민들은 산을 통틀어 깃대봉이라 부른다. 하산은 길게 타고자 한다면 왕재산을 넘어 진고개로 내려선 다음 한월리해변을 거쳐 마을로 돌아오는 코스가 좋다.
짧게 탄다면 흘기재에서 곧장 갈림길을 따라 내려서면 30분 만에 마을에 닿는다. 선착장에서 700m 떨어진 문갑마을 유수지공원을 기점으로 깃대봉을 다녀오는 짧은 산행은 4.3km이며 3시간 정도 걸린다. 야영은 한월리해변에서 가능하며 텐트 한 동당 1박에 1만 원을 받는다. 화장실과 개수대가 있다.
교통 덕적도까지 가서 덕적군도 일대를 순회하는 나래호로 갈아타야 한다. 덕적도행 배는 인천항 연안여객터미널(1599-5985)과 안산 대부도 방아머리선착장(032-886-7813)에서 운항한다. 인천에서는 덕적도행 배가 하루 3회 운항(주말 08:00, 08:30, 15:00, 평일 08:30, 09:10, 14:30)한다. 문갑도행 나래호는 매일 오전 11시20분에 출발한다. 문갑도까지 20분 걸린다. 쾌속선을 탈 경우 덕적도에서 나래호를 타는 선착장이 500m 떨어져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문갑도에서 덕적도로 가는 배는 매일 오후 2시 한 번. 덕적도에서 인천행은 3회(주말 09:30, 15:30, 16:30, 평일 10:00, 15:30, 16:00) 운항. 평일과 주말 뱃시간이 다르고, 매월 시간이 바뀌므로 선사 혹은 여객터미널에서 확인해야 한다. ‘가보고 싶은 섬’ 앱을 활용하면 모바일 승선권 발급이 가능해 예약이 편리하다.